이 시의 화자는 ‘신발’로 환유된 자아의 탐색 과정 속에서, 삶의 본질적 구심점은 늘 내 안에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늙은 신발’이 되어 먼 여행에서 돌아온 화자는 부재하는 어머니를 인식하고 허탈해하지만, 뜻밖에도 어머니는 홀로 밤하늘 속으로 걸어가 북극성으로 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북극성’은 ‘늙은 신발’이 찾아 헤맨 또 다른 화자였던 것이다. 시적 화자가 잃어버린 자아는 먼 곳에 물리적이고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떠났던 곳에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시인은 신발 끈도 매지 않고 어딘가를 돌아다니다가 신발이 ‘늙은 신발’이 되어서야 성서 속의 ‘돌아온 탕자’아 같이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집에 계시지 않는다. 시인이 신발 끈을 매지 못하고 길을 떠난 것은 ‘신발 끈을 맬 때마다’ ‘높은 나뭇가지 끝에 / 목을 매려고 묶었던 / 넥타이 두 개’가 목을 조여 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신발 끈을 맬 때마다」이러한 느낌은 여기서의 신발이 단순히 발에 신는 신발이 아니라 시인의 몸을 가리키는 제유이면서 동시에 인생의 환유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시인이 신발 끈을 매는 것이 넥타이로 자신의 목을 매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길을 떠나는 행위 자체의 불확실한 전망에 기인한다. 시인은 그의 또 다른 시 「입산」에서 ‘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너는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 너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 / 너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 나는 한참 길가에 앉아 /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 시들어가는 민들레 꽃잎을 들여다 보다가 / 천천히 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고 하여, ‘너’를 찾아가는 길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은 곧 ‘나’를 찾는 일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늙은 신발’이 되어 먼 여행에서 돌아온 시적 화자는 부재하는 어머니를 인식하고 허탈해하지만, 뜻밖에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불 꺼진 안방에서 환청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 시에서 어머니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아들아, 섬 기슭을 향해 힘차게 달려오던 파도가 스러졌다고 해서 / 바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 아들아,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 집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 비가 그친 것이 아니다’는 말은 현상적으로 부재하는 어머니가 영원히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이 시의 문맥을 따라가다 보면 어머니는 홀로 밤하늘 속을 걸어가 북극성으로 떠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의 ‘북극성’은 시적 화자가 신발 끈도 매지 않고 평생을 다녀온 곳이 어디인지, 도대체 누구를 만나고 온 것인지 모르는 불확실한 삶 속에서 유일하게 믿음을 주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북극성’은 ‘늙은 신발’이 찾아 헤매던 또 다른 자아인 것이다. 말하자면 시적 화자가 잃어버린 자아는 먼 곳에 물리적이고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떠났던 곳, 즉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와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본질적은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막연히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만나려고 떠났던 여행은 전혀 무모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시인이 떠났던 여행이 신발 끈을 매지도 못하고 떠났다가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황급하게 돌아오는 여행이라는 점에서는 무모한 것이고, 이러한 여행이 인간이면 누구나 떠나야 하는 본원적인 여행이고, '늙은 신발‘로 돌아와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이며 거울인 ’북극성‘을 바라보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유용한 여행인 것이다. 지금도 지구의 먼 길을 돌아온 ’늙은 신발‘은 자신의 내면의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바라보듯 ’북극성‘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별 위에서 별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인간이 살고 있는 별은 인간의 눈에는 안보이지만,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의 눈에는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별 중의 하나로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이 별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별을 보기 위해 하늘을 본다. 그러나 별은 태양이 환하게 빛나는 낮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밤은 낮의 밝은 빛 속에 숨어있던 별들을 어둠이라는 배경의 앞부분에 전경화 시켜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인간은 어둠 속에서 별을 만나고 빛 속에서 별과 헤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어둠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 어둠은 스스로 그 안에 별을 품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어둠이 된 인간은 끝없이 별을 찾아 헤맨다. 인간이 찾아 헤매는 별은 ‘희망’과‘결핍’이라는 이름을 가진 쌍둥이 별이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인간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적인 몸을 입고 있지 않고, 관념이나 꿈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늘의 별을 보면서 ‘희망’이나 ‘꿈’, ‘슬픔’이나 ‘아픔’과 같은 관념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이 바라보고 싶어하는 별이 자연 그대로의 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호승의 시를 대표하는 가장 중심적인 이미지는 별이다. 정호승 시인의 시에는 도처에 별이 널려있다. 정호승은 스스로 별이 되어 별과 대화를 나누는 시인이다. 그러므로 그의 등단작이 「첨성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별을 노래하던 윤동주의 「서시」가 그렇듯이,「첨성대」는 정호승 시인의 본적지와 같은 작품이다. 윤동주가 하늘의 별을 보면서 일제 암흑기를 견뎠다면, 정호승은 ‘첨성대’가 되어 별을 보면서 참담한 민주화의 암흑기를 견뎌낸 시인이다. 그에게서 ‘별’은 ‘희망’이면서 ‘슬픔’이고 ‘빛’이면서 ‘어둠’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더러워진 구두를 닦듯이 별을 닦는다.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통에 새벽별 가득 따 담고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골고루 나누어주기 위해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 닦는 소년」부분
인용 시에서 ‘구두’와 ‘별’은 모두 닦여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친연성을 지니고 있다. 시인이 구두를 닦는 행위는 별을 닦는 행위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두’는 지상의 ‘별’인 셈이다. 그런데 ‘구두’라는 별은 빛과 어둠을 동시에 품고 있는 별이다. 이 시에서의 별을 닦는 행위는, 윤동주가 「참회록」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자아인 거울을 밤마다 닦으면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이/거울 속에 나타나온다”고 하여 ‘거울’을 닦는 행위와 ‘별’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윤동주의 시에서 ‘운석’은 ‘지상에 떨어지는 별’로서의 시인 자신의 슬픈 자화상을 암시해주는 대상이다. 이렇듯 윤동주의 시에서나 정호승의 시에서나‘별’은 흔히 존재론적 자아를 상징한다. 정호승의「북극성」은 시인에게는 자아를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다. 그는 그의 일곱 번째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소재, 같은 이름의 작품에서 ‘북극성’을 또 다른 지구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북극성에서 홀로 지구를 바라본다/지구에서 나를 바라보는 네가 보인다/지구에는 지금 꽃 상여 하나가 지나간다/북극성에는 지금 매화꽃이 지고 있다/지구에서 평생 북극성을 바라보면/북극성도 한낱 눈물에 지나지 않는다/북극성에서 평생 지구를 바라보면/지구도 한낱 눈물에 지나지 않는다
-「북극성」전문(일곱 번째 시집 소재)
인용 시에서 보듯 정호승 시인에게 있어서 ‘북극성’과 ‘지구’는 서로 구별되어 있지 않은 쌍둥이와 같은 별이다. 과학적으로 보더라도 지구의 축은 북극성에 닿아있어서 지구와 북극성은 항상 한 몸이 되어 우주를 순환한다. 시인은 지구에서 북극성을 바라보듯 북극성에서 지구를 바라보면서 북극성이나 지구가 모두 한낱 눈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는 장자가 제물론(齊物論)에서 만물을 평등한 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것과 상통한다. 장자의 제물론에 의하면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동등한 관계의 인연을 맺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시인이 유독 ‘북극성’을 다른 별과 구별해서 지구의 자화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북극성이 다른 별들과는 달리 자신의 위치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필자가 본격적으로 거론하려는 「북극성」(『문학사상』2005년 3월호)의 전반부를 읽어보자.
신발 끈도 매지 않고 나는 평생 어디를 다녀 온 것일까 도대체 누구를 만나고 돌아와 황급히 신발을 벗는 것일까 길 떠나기 전에 신발이 먼저 닳아버린 줄도 모르고 길 떠나기 전에 신발이 먼저 울어버린 줄도 모르고 나 이제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와 늙은 신발을 벗고 마루에 걸터앉는다
시인은 신발 끈도 매지 않고 어딘가를 돌아다니다가 신발이 ‘늙은 신발’이 되어서야 성서 속의‘돌아온 탕자’와같이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집에 계시지 않는다. 시인이 신발 끈을 매지 못하고 길을 떠난 것은“신발 끈을 맬 때 마다”“높은 나뭇가지 끝에 /목을 매려고 묶었던/ 넥타이 두 개”가 목을 조여 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신발 끈을 맬 때마다」) 이러한 느낌은 여기서의 신발이 단순히 발에 신는 신발이 아니라 시인의 몸을 가리키는 제유이면서 동시에 인생의 환유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시인이 신발 끈을 매는 것이 넥타이로 자신의 목을 매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길을 떠나는 행위 자체의 불확실한 전망에 기인한다. 시인은 그의 또 다른 시 「입산」에서 “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너는 산으로 들어가버렸다/너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너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버렸다//나는 한참 길가에 앉아/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시들어가는 민들레 꽃잎을 들여다보다가/천천히 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고 하여, ‘너’를 찾아가는 길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은 곧 ‘나’를 찾는 일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스신화에 보면 노파를 업고 강을 건너다가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영웅 모노산달로스(이아손의 별명)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의 모노산달로스(Monosandalos)는 ‘신발을 한 짝만 신은 사나이’라는 뜻으로, 인간이 길을 떠나는 행위가 잃어버린 자아, 즉 또 다른 신발을 찾아나서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스신화뿐 아니라, 지팡이에 신발 한짝을 걸고 다니는 달마대사나 유리구두와 꽃신을 잃어버린 신데렐라와 콩쥐도 모두 모노산달로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위의 시에서, 길 떠나기 전에 신발이 먼저 닳아버리고 울어버렸다는 진술 속의‘신발’은 단순한 신발이 아닌 인생이나 자아의 환유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은 길을 떠나기도 전에 불완전한 신발(자아)의 상태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즉 시인의 무의식적 자아는 자신이 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후에 알게 될 어머니의 부재와 닳아버린‘늙은 신발’의 존재까지도 이미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시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보자.
아들아, 섬 기슭을 향해 힘차게 달려오던 파도가 스러졌다고 해서 바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들아,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 집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비가 그친 것이 아니다 불 꺼진 안방에서 간간이 미소 띠며 들려오는 어머니 말씀 밥 짓는 저녁 연기처럼 홀로 밤하늘 속으로 걸어가시는데 나는 그동안 신발 끈도 매지 않고 황급히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도대체 누구를 만나고 돌아와 저 멀리 북극성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늙은 신발’이 되어 먼 여행에서 돌아온 시적 화자는 부재하는 어머니를 인식하고 허탈해하지만, 뜻밖에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불꺼진 안방에서 환청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위 시에서 어머니가 아들에게 들려주는“아들아, 섬 기슭을 향해 힘차게 달려오던 파도가 스러졌다고 해서/바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아들아,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 집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고 해서/비가 그친 것이 아니다”는 말은 현상적으로 부재하는 어머니가 영원히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이 시의 문맥을 따라가다 보면 어머니는 홀로 밤하늘 속을 걸어가 북극성으로 떠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의 ‘북극성’은 시적 화자가 신발 끈도 매지 않고 평생을 다녀온 곳이 어디인지, 도대체 누구를 만나고 온 것인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삶 속에서 유일하게 믿음을 주는 존재이다. 앞에서 예시한 「구두 닦는 소년」에서 ‘구두’와 ‘별’이 친연성을 지니고 있듯이, ‘늙은 신발’로 상징되는 시적 화자와 어머니로 상징되는 ‘북극성’도 상호 잃어버린 또 다른 신발로서의 친연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북극성’은 ‘늙은 신발’이 찾아 헤매던 또 다른 자아인 것이다. 말하자면 시적 화자가 잃어버린 자아는 먼 곳에 물리적이고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떠났던 곳, 즉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와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본질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막연히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만나려고 떠났던 여행은 전혀 무모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시인이 떠났던 여행이 신발 끈을 매지도 못하고 떠났다가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황급하게 돌아오는 여행이라는 점에서는 무모한 것이고, 이러한 여행이 인간이면 누구나 떠나야 하는 본원적인 여행이고,‘늙은 신발’로 돌아와 자신의 또 다른 자이이며 거울인‘북극성’을 바라보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유용한 여행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아마 언젠가는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언제나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기 위하여/ 검은 낮 하얀 밤마다 먼 길을 가는 자”(「눈발」)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구의 먼 길을 돌아온 ‘늙은 신발’은 자신의 내면의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바라보듯 ‘북극성’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출처 : http://cafe.naver.com/choiinho.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882 >
박남희
인간은 별 위에서 별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인간이 살고 있는 별은 인간의 눈에는 안보이지만,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의 눈에는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별 중의 하나로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이 별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별을 보기 위해 하늘을 본다. 그러나 별은 태양이 환하게 빛나는 낮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밤은 낮의 밝은 빛 속에 숨어있던 별들을 어둠이라는 배경의 앞부분에 전경화 시켜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인간은 어둠 속에서 별을 만나고 빛 속에서 별과 헤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어둠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 어둠은 스스로 그 안에 별을 품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어둠이 된 인간은 끝없이 별을 찾아 헤맨다. 인간이 찾아 헤매는 별은 ‘희망’과‘결핍’이라는 이름을 가진 쌍둥이 별이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인간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적인 몸을 입고 있지 않고, 관념이나 꿈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늘의 별을 보면서 ‘희망’이나 ‘꿈’, ‘슬픔’이나 ‘아픔’과 같은 관념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이 바라보고 싶어하는 별이 자연 그대로의 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호승의 시를 대표하는 가장 중심적인 이미지는 별이다. 정호승 시인의 시에는 도처에 별이 널려있다. 정호승은 스스로 별이 되어 별과 대화를 나누는 시인이다. 그러므로 그의 등단작이 「첨성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별을 노래하던 윤동주의 「서시」가 그렇듯이,「첨성대」는 정호승 시인의 본적지와 같은 작품이다. 윤동주가 하늘의 별을 보면서 일제 암흑기를 견뎠다면, 정호승은 ‘첨성대’가 되어 별을 보면서 참담한 민주화의 암흑기를 견뎌낸 시인이다. 그에게서 ‘별’은 ‘희망’이면서 ‘슬픔’이고 ‘빛’이면서 ‘어둠’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더러워진 구두를 닦듯이 별을 닦는다.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통에 새벽별 가득 따 담고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골고루 나누어주기 위해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 닦는 소년」부분
인용 시에서 ‘구두’와 ‘별’은 모두 닦여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친연성을 지니고 있다. 시인이 구두를 닦는 행위는 별을 닦는 행위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두’는 지상의 ‘별’인 셈이다. 그런데 ‘구두’라는 별은 빛과 어둠을 동시에 품고 있는 별이다. 이 시에서의 별을 닦는 행위는, 윤동주가 「참회록」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자아인 거울을 밤마다 닦으면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이/거울 속에 나타나온다”고 하여 ‘거울’을 닦는 행위와 ‘별’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윤동주의 시에서 ‘운석’은 ‘지상에 떨어지는 별’로서의 시인 자신의 슬픈 자화상을 암시해주는 대상이다. 이렇듯 윤동주의 시에서나 정호승의 시에서나‘별’은 흔히 존재론적 자아를 상징한다.
정호승의「북극성」은 시인에게는 자아를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다. 그는 그의 일곱 번째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소재, 같은 이름의 작품에서 ‘북극성’을 또 다른 지구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북극성에서 홀로 지구를 바라본다/지구에서 나를 바라보는 네가 보인다/지구에는 지금 꽃 상여 하나가 지나간다/북극성에는 지금 매화꽃이 지고 있다/지구에서 평생 북극성을 바라보면/북극성도 한낱 눈물에 지나지 않는다/북극성에서 평생 지구를 바라보면/지구도 한낱 눈물에 지나지 않는다
-「북극성」전문(일곱 번째 시집 소재)
인용 시에서 보듯 정호승 시인에게 있어서 ‘북극성’과 ‘지구’는 서로 구별되어 있지 않은 쌍둥이와 같은 별이다. 과학적으로 보더라도 지구의 축은 북극성에 닿아있어서 지구와 북극성은 항상 한 몸이 되어 우주를 순환한다. 시인은 지구에서 북극성을 바라보듯 북극성에서 지구를 바라보면서 북극성이나 지구가 모두 한낱 눈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는 장자가 제물론(齊物論)에서 만물을 평등한 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것과 상통한다. 장자의 제물론에 의하면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동등한 관계의 인연을 맺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시인이 유독 ‘북극성’을 다른 별과 구별해서 지구의 자화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북극성이 다른 별들과는 달리 자신의 위치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필자가 본격적으로 거론하려는 「북극성」(『문학사상』2005년 3월호)의 전반부를 읽어보자.
신발 끈도 매지 않고
나는 평생 어디를 다녀 온 것일까
도대체 누구를 만나고 돌아와 황급히 신발을 벗는 것일까
길 떠나기 전에 신발이 먼저 닳아버린 줄도 모르고
길 떠나기 전에 신발이 먼저 울어버린 줄도 모르고
나 이제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와
늙은 신발을 벗고 마루에 걸터앉는다
시인은 신발 끈도 매지 않고 어딘가를 돌아다니다가 신발이 ‘늙은 신발’이 되어서야 성서 속의‘돌아온 탕자’와같이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집에 계시지 않는다. 시인이 신발 끈을 매지 못하고 길을 떠난 것은“신발 끈을 맬 때 마다”“높은 나뭇가지 끝에 /목을 매려고 묶었던/ 넥타이 두 개”가 목을 조여 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신발 끈을 맬 때마다」) 이러한 느낌은 여기서의 신발이 단순히 발에 신는 신발이 아니라 시인의 몸을 가리키는 제유이면서 동시에 인생의 환유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시인이 신발 끈을 매는 것이 넥타이로 자신의 목을 매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길을 떠나는 행위 자체의 불확실한 전망에 기인한다. 시인은 그의 또 다른 시 「입산」에서 “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너는 산으로 들어가버렸다/너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너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버렸다//나는 한참 길가에 앉아/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시들어가는 민들레 꽃잎을 들여다보다가/천천히 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고 하여, ‘너’를 찾아가는 길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은 곧 ‘나’를 찾는 일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스신화에 보면 노파를 업고 강을 건너다가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영웅 모노산달로스(이아손의 별명)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의 모노산달로스(Monosandalos)는 ‘신발을 한 짝만 신은 사나이’라는 뜻으로, 인간이 길을 떠나는 행위가 잃어버린 자아, 즉 또 다른 신발을 찾아나서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스신화뿐 아니라, 지팡이에 신발 한짝을 걸고 다니는 달마대사나 유리구두와 꽃신을 잃어버린 신데렐라와 콩쥐도 모두 모노산달로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위의 시에서, 길 떠나기 전에 신발이 먼저 닳아버리고 울어버렸다는 진술 속의‘신발’은 단순한 신발이 아닌 인생이나 자아의 환유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은 길을 떠나기도 전에 불완전한 신발(자아)의 상태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즉 시인의 무의식적 자아는 자신이 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후에 알게 될 어머니의 부재와 닳아버린‘늙은 신발’의 존재까지도 이미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시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보자.
아들아, 섬 기슭을 향해 힘차게 달려오던 파도가 스러졌다고 해서
바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들아,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 집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비가 그친 것이 아니다
불 꺼진 안방에서
간간이 미소 띠며 들려오는 어머니 말씀
밥 짓는 저녁 연기처럼 홀로 밤하늘 속으로 걸어가시는데
나는 그동안 신발 끈도 매지 않고 황급히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도대체 누구를 만나고 돌아와
저 멀리
북극성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늙은 신발’이 되어 먼 여행에서 돌아온 시적 화자는 부재하는 어머니를 인식하고 허탈해하지만, 뜻밖에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불꺼진 안방에서 환청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위 시에서 어머니가 아들에게 들려주는“아들아, 섬 기슭을 향해 힘차게 달려오던 파도가 스러졌다고 해서/바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아들아,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 집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고 해서/비가 그친 것이 아니다”는 말은 현상적으로 부재하는 어머니가 영원히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이 시의 문맥을 따라가다 보면 어머니는 홀로 밤하늘 속을 걸어가 북극성으로 떠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의 ‘북극성’은 시적 화자가 신발 끈도 매지 않고 평생을 다녀온 곳이 어디인지, 도대체 누구를 만나고 온 것인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삶 속에서 유일하게 믿음을 주는 존재이다. 앞에서 예시한 「구두 닦는 소년」에서 ‘구두’와 ‘별’이 친연성을 지니고 있듯이, ‘늙은 신발’로 상징되는 시적 화자와 어머니로 상징되는 ‘북극성’도 상호 잃어버린 또 다른 신발로서의 친연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북극성’은 ‘늙은 신발’이 찾아 헤매던 또 다른 자아인 것이다. 말하자면 시적 화자가 잃어버린 자아는 먼 곳에 물리적이고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떠났던 곳, 즉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와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본질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막연히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만나려고 떠났던 여행은 전혀 무모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시인이 떠났던 여행이 신발 끈을 매지도 못하고 떠났다가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황급하게 돌아오는 여행이라는 점에서는 무모한 것이고, 이러한 여행이 인간이면 누구나 떠나야 하는 본원적인 여행이고,‘늙은 신발’로 돌아와 자신의 또 다른 자이이며 거울인‘북극성’을 바라보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유용한 여행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아마 언젠가는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언제나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기 위하여/ 검은 낮 하얀 밤마다 먼 길을 가는 자”(「눈발」)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구의 먼 길을 돌아온 ‘늙은 신발’은 자신의 내면의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바라보듯 ‘북극성’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현대시학>2005년 4월호
<출처 : http://www.feelpoem.pe.kr/zeroboard/zboard.php?id=creation&no=3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