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에 대해서

이온디
2007년 09월 13일

황지우

황지우 (黃芝雨) 1952년 전라남도 해남 출생

서울대학교 미학과 및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시인 약력>

1952년 전남 해남 출생

광주일고. 서울대 미학과 졸. 동 대학원.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졸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

[문학과 지성]에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으로 문단 데뷔

김수영 문학상 수상, 현대문학상 수상, 소월시 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게눈 속의 연꽃] 등 다수

1980년『중앙일보』 신춘문예에《연혁(沿革)》이 입선

1980년『문학과 지성』에《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83년 제3회【김수영 문학상】수상

1991년 제36회【현대문학상】수상

1994년 제8회【소월시 문학상】수상<

시   집:《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1985,

         《나는 너다》1987,《게 눈 속의 연꽃》1990  등...

상실과 욕망을 넘어서는 자리   

                                     -황지우론-  

1

황지우의 두 시집을 읽고 나면, 혼란스러움과 당혹감이 서로 교차한다. 첫시집《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문학과지성사, 1983)는 일종의 보고서이면서 단순한 일상의 보고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시적 상상력의 세계를 시화하고 있다. 이는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의 시는 현실을 여과하여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그 방법론은 상징과 풍자이다. 이런 점에서 황지우 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의 시에 내재한 상징과 풍자의 세계를 정확히 ?font color=red>ㅎ爭뺨?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시는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현실을 상징과 풍자로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두 번째 시집《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민음사, 1985)는 이 상징적 장치가 더욱 심하게 나타나며, '형식의 파괴'라는 해체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기왕의 논자들은 이 해체 기법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형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에 대해 뚜렷한 이견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황지우 시에 대한 논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의 시에는 해체 기법과 현대 산업 사회의 도시성 등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서구적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 평가는 정당할까? 황지우 시는 우리 문학의 전통적 모더니즘의 연속선상에 있지는 않을까? 이 두 가지 질문은 그의 시를 '포스트모더니즘' 전형이라고 평가하는 논자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우리는 황지우 시를 하나하나 ?font color=red>ㅎ?나가는 동안, 이 '형식의 파괴'는 단순한 모방과 기법의 파괴만을 일삼는 포스트적 '언어 유희'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오히려 '세계와 화자'의 이원적 대립에서 발생하는 원형적 세계의 상실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상실'은 황지우 시를 이해하는 기본적 테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상실'에서 상징과 풍자의 세계를 향하는 언어적 대응, 이를 향한 끊임없는 언어적 탐구가 그의 시 정신일 것이다. 사실, 황지우 시의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은 80년대 이후 끊임없이 지속된 하나의 논쟁거리였다. 그리고 이 논쟁은 우리 시에 대한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80년대 이후 우리 시단의 풍성한 비판적 성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그 성과를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황지우 시의 서구적 잣대는 우리 문학의 서구적 이식관점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황지우 시의 '포스트적 관점'을 지켜보면서, 1940년《조선신문학사》에서 임화가 '이식문학론(移植文學論)'을 제기한 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서구문학에 맹종해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따라서 황지우 시의 전통성을 밝히는 작업은 90년대 우리 문학의 새로운 위상의 정립에 값하는 노력이라고 본다. 이 전통성은 30년대 이상에서 비롯하여, 50년대 '후반기 동인'으로 이어지는 모더니즘 운동에 닿아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이상과 황지우 시의 유사점과 차별성을 통해, 황지우 시의 모더니즘적 성과를 살피려고 한다.

2

이상의 대표시 <오감도>는 정신적 외상의 불안심리를 상징적으로 시화하고 있다. 이 상징의 세계는 주로 닫혀진 세계의 자아 소외에 놓여 있다. 이 자아 소외는, '욕망 결핍→소외→절망→죽음'의 순환 논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 <오감도> 연작은 비극적 세계에 값하는 죽음의 상징적 기호 체계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상의 비극적 세계 인식을 좀더 눈여겨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이상의 비극적 세계 인식은 '아버지 상실'이라는 '원형적 세계의 상실'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는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에서 말하는 '타자에 의해 매개된 욕망'의 상실이다. 다음 시를 살펴보자.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 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니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 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 <시제2호> 전문

고은의《이상 평전》(민음사, 1974)에 따르면, 이상은 '어린 시절 백부 집의 양자로 입양'되어 성장기를 보낸다. 이 사실은, 이상이 부정(父情)을 상실하는 정신적 외상(外傷)을 겪었음을 의미한다. <시제2호>는 '아버지 상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화자의 '아버지 상실'은 결국 '아버지의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하는 비극적 세계를 의미한다. 이 시는 '아버지'에서 '화자'로 향하는 하강적 세대 교체가 '화자'에서 '아버지'의 상승적 역할 전이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그리고 이 비극은 자아 분열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라캉에 따르면, 이 과정은 '거울단계(mirror stage)'이며, 이 단계에서 '자아의 분열상'이 극도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비극의 심화'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상실의 비극적 세계는 모성 본능의 躍좇막?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여성에 대한 그리움, 성적 유희로 드러나는데, 이것은 '아버지 상실'의 욕망 결핍에서 나타나는 상징적 '전이(transfer)'이다. 다음 시의 상징성을 살펴보자.

龜裂이生긴 莊稼이녕의地에한대의棍棒을꽂음. 한대는한대대로커짐. 樹木이盛함. 以上꽂는것과盛하는것과의圓滿한融合을가리킴. - <건축무한육각면체> 부분

이 시는 성적 유희 장면을 시화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균열이 생긴 땅'은 여성을, 한 대의 곤봉은 남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다음 행에서 성적인 결합의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상징화된 성적 유희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색정적 이미지를 통한 낯설게 하기'기법이다. 이 시는 욕망 결핍을 보양하는 모성 본능의 상징적 표현이다. 달리 말하면, '아버지 상실'에 따른, '상징적 전이'가 성적 유희로 시화되었다는 것이다. 때론, 이 '상징적 전이'는 '낯선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의 시에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시어의 해체, 숫자 상징 등이라 할 수 있다. 시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각면체> 등은 비극적 세계의 상징적 시화이다. 이와 유사하게, 황지우 시의 정신적 배경은 현실에 대응하는 자아가 절망하는 비극적 세계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비극적 세계란, '아버지 상실'에 대한 허무이며, '떠남→과정→돌아옴'의 귀환형 속성이 파괴된 데서 오는 비극적 상실이다. 더군다나 이 비극은 아버지 상실이라는 현실적 고통과, 이를 극복하려는 욕망, 그리고 끝내 현실을 떠나지 못하는 괴로움 사이를 오고가는 것이다.

⑴ 섣달 스무 아흐레 어머니는 시루떡을 던져 앞 바다의 흩어진 물결들을 달래었습니다. (… 중략…) 어머니는 저를 붙들었고 內地에는 다시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그럴수록 近視의 겨울 바다는 눈부신 저의 눈시울에서 여위어 갔습니다. 아버님이 끌려가신 날도 나루터 물결이 저렇듯 잠잠했습니다. 물가에 서면 가끔 지친 물새떼가 저의 어지러운 무릎까지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느 외딴 물나라에서 흘러 들어온 흰 상여꽃을 보는 듯했습니다. 꽃 속이 너무나 환하여 저는 빨리 잠들고 싶었습니다. - <沿革> 부분

⑵ 오 幻生을 꿈꾸며 새로 태어나고 싶은 물소리, 엿듣는 풀의 淚腺 살아있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의 이름을 부르며 살 뿐, 있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의 이름을 부르며 살 뿐,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로다. 저 타오르는 불 속은 얼마나 고요할까 傷한 촛불을 들고 그대 이슬 속으로 들어가, 곤히, 잠들고 싶다. - <草露와 같이> 부분

황지우가 상재한 두 시집은 상실의 세계와 욕망의 세계를 왕래하는 비극적 인식을 보여준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비극적 인식은 압축, 감정 전이, 형상화, 무의식적 공간의 네 단계로 나타난다. 그의 시의 출발은 '아버지 상실'이며, 이는 화자의 정신 세계에 늘 '압축'되어 있다. 그래서 이 '압축'은 비극적 '감정 전이'로 시화되는 것이다. 이 '감정 전이'의 상징은 그의 시를 특이하고, 돌발적이게 하는 기본적 장치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시가 '아버지 상실'의 비극적 상징에서 출발함을 알 수 있다.

상실은 자아의 결핍이며, 타자와 소통할 수 없는 '닫힌 속성'을 의미한다. 시 ⑴, ⑵를 읽으면, 잔잔한 어떤 공간이 떠오른다. 이 공간적 배경은 어린 시절 해남의 바닷가이다. 시 ⑴은 아버지가 떠난 해남의 솔섬을 회상하며, 자아 상실의 비극을 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죽은 아버지의 영혼을 달래는 진혼 의식(鎭魂儀式)으로 '시루떡'을 바다에 던진다. 어머니의 '한'은 연기로 타올라 화자의 눈시울을 적신다. 어린 시절 화자의 의식에 잠재해 있는 '아버지 상실'의 비극적 '압축'은 '감정 전이'를 거쳐 상징적 공간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 상징적 공간은 '아버지'라는 원형성의 상실에서 비롯하며, 이 상실은 화자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시 ⑴에서 시어 '물', '흰 상여꽃', '잠' 등은 모두 죽음의 상징적 이미지이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물'은 몇 가지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 '바다'와 같은 '깊은 물'은 몽상의 '물'이며, 동시에 이 '물'은 '죽음'을 상징한다. 시 ⑴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시어는 깊고, 어두운 심연의 세계, 즉 죽음의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자의 의식은 죽음의 세계에 한없이 빠져들고 있다. 물가에 서서 과거의 추억을 쫓아가던 화자는 깊은 심연 속에 잠들어 있던, '아버지 상실'의 비극을 만나게 되고, 화자는 깊은 죽음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시 ⑴은'아버지 상실'에서 오는 비극적 죽음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시이다.

시 ⑵는 절망적 세계에 대한 죽음의 미학을 보다 조용한 견자(voyant)의 시각으로 시화하고 있다. 여기서 시어 '촛불'은 '삶과 죽음'의 대립적 세계를 오고가는 상징어이다. 바슐라르의《촛불의 미학》에 따르면, '촛불'은 원형적 몽상의 세계를 상징하며, '삶과 죽음'의 대립적 상황이 교차하는 이미지이다. 이것은 화자가 체험하게 되는 정신적 공간에 길항하고 있다. 이 시는 아버지 상실의 비극을 상징적 세계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실은, '떠남→과정→돌아옴'의 귀환형 구조가 아니라, 닫힌 구조라는 점에서 보다 비극적이다. 시 ⑵에서 '傷한 촛불'은 삶과 죽음의 이원적 대립이 소멸되는 공간을 의미한다.그리고 이 소멸은 절대 고독의 '이슬' 속으로 까맣게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그대의 이슬 속으로' 들어가 '잠들고 싶은' 비극적 죽음의 공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의 정신 세계와 대응 구조를 이루는 공간은, 새벽 이슬이 내리는 싸늘한 죽음의 세계이다. 따라서 시 ⑵는 밝음에서 어둠의 세계로 향하는, 다시 말하면, '삶'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비극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상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허무 의식에 사로잡힌 절대적 상실의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아버지 상실'의 비극적 상징은 '그 무엇이 건너뛴 不在者 申告의, 빈자리로' 다가와서는 '生時의 그 눈썹으로 살아있는'(<천사들의 계절>) 화자를 노려보기도 하면서, 화자의 의식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남쪽 솔섬의 추억은 황지우 시의 정신적 공간을 지배하는 비극성이며, 이는 '감정 전이'를 거쳐 상징의 세계로 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비극적 세계는 그의 시를 이루는 중요한 골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화자의 '아버지 상실'과 비극적 상징의 조응(照應)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두 시집에 나타난 비극적 상징의 진정성 무엇일까? 두 시집의 시 형식은 전체적으로 일상의 파괴, 형식의 파괴, 방법론의 새로움 등으로 압축된다. 이는 이상(李箱)과 마찬가지로, 그 뿌리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이상과 황지우 시에서 상징의 진정성과 차별성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면, 이상 시의 상징은 비극적 세계에 절망한 죽음을 의미하지만, 황지우 시의 상징은 방법론적 상징의 풍자성을 내포하고 있다는데 있다. 이것은 전치(轉置)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심각성을 단순함으로, 성글음을 세밀함으로,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꾸는 작업을 말한다. 다음 시를 살펴보자.

⑴ 山 /절망의 산, /대가리를밀어버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산, 사랑의산, 침묵의 /산, 함성의산, 증인의산, 죽음의산, - <無等>부분

⑵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오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 <심인>부분

⑶ 오늘 아침 버스를 타는데, 뒤에서 두 번째 오른쪽 좌석에 누군가 한 상 걸게 게워낸 자국이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사람들은 거기에 서로 먼저 앉으려다 소스라치면서 달아났다. 거기는, 밥알 55%, 김치 찌꺼기 15%, 콩나물 대가리 10%, 두부 알갱이 7%, 달걀 후라이 노른자위 흰자위 5%, 고춧가루 5%, 기타 3% 順으로. - <버라이어티 쇼, 1984>부분

시 ⑴은 산의 시각적 상징화이다. 이것은 삼각형의 안정 구조를 통해서 불평등한 세계에 대한 증오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형식적 배열을 삼각형으로 하면서, 시각적 안정을 꾀하고 있으며, 내용은 '분노, 함성, 죽음' 등의 어두운 시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시각적 '안정'과 내용의 '불안정'을 교묘하게 전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적 발상은 색다르다. 그렇지만, 이 시에 내포되어 있는 '방법론적 전치'를 읽어 내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이 시는 절망적 슬픔을 시각적 전치 방법으로 상징화한 것이다. 이러한 내밀한 '역설적 상징'은 그의 시를 읽는 독자에게 당혹감과 혼란스러움을 갖게 한다. 시 ⑵, ⑶은 광고 내용과 일상적인 삶의 흔적을 통하여 관심과 무관심의 내용적 전치를 보여주고 있다. 시 ⑵는 사람 찾는 신문 광고를 짜집기 한 시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사람을 찾는 절박한 광고를 화장실에서 똥을 누면서 읽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찾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전치를 발견할 수 있다. 절박하게 찾는 사람과 그냥 무관심하게 읽는 화자와는 절대적 괴리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화자의 의식 세계에 드러나는 일정한 '전치'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화자와 세계의 대립 속에서 철저히 소외된 단절된 자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소외의 근원은 앞에서 밝힌, '아버지 상실'이 놓여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세계를 철저히 냉소적으로 관찰하고 있다.  그러나, 시 ⑶은 ⑵의 시와는 정반대로 무관심한 것에 대한 세밀한 관심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시는 지나칠 정도로 분석적이고, 치밀하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묘사는 우리에게 무관심을 관심으로 전치시키는 역할을 한다 시 ⑵와 ⑶을 동시에 읽을 때, 우리는 '무관심과 관심'이 전치된 하나의 방법론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방법론은 그의 시를 돌발적이고, 당혹하게 만드는 장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이 방법론은 비교적 최근의 시 <지하철역에 기대고 서 있는 雲舟寺 석불>(창작과비평, 1995, 봄호)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방법론적 전치'를 통해 새로운 시 형식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황지우 시는 이상의 시와 닮은꼴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상은 식민지 시대 우울한 지식인의 비극적 세계에 대한 절망을 시화하고 있지만, 황지우는 이 절망적 세계의 비극성을 넘어서는 '방법론적 전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전통적 계승을 통하여 현대적 의미로 재구성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상이 절망한 비극적 세계에서 새로운 시적 출발점으로 구성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시가 새롭게 읽혀야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3

황지우 시의 진정성은 어디에 있을까? 이 물음은 간단히 대답하기 힘들다. 잠정적이지만, 그의 시는 종래의 일상성과 보편성을 바꾸는 '방법론적 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통의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30년대 이상의 '상실'이 개인의 욕구와 그 상징에 놓여 있지만, 황지우는 개인보다는 사회라는 공동체적 모순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황지우 시의 '방법론적 전치'가 갖는 참된 의미는무엇일까? 섣불리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는 이 '방법론적 전치'를 통하여 현대인의 절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현대인의 비대한 욕망에 절망한다. 그래서 그는 본능적인 욕망 뿐만 아니라, 명예욕, 정치욕 등으로 점철된 현대인의 욕망을 비판한다. 그의 시는 현대인의 비대한 욕망에 대한 시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욕망(desire)은 생물의 행동을 야기시키는 개체의 동기와 원인이다. 마스로에 따르면, 욕망은 '생리적 욕구를 기초로 하여, 안전 욕구, 애정 욕구, 자존 욕구, 자아 실현 욕구 등 다섯 가지 욕구가 계층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 다섯 가지 욕구 중, 그의 시는 '애정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화자의 욕망은 '아버지 상실'에 의한 비극적 상징으로 표출되었는데, 그의 시는 이러한 비극적 세계의 '욕망 결핍'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상징화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상징성을 접하면서 만나게 되는 또 하나의 방법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풍자'이다. 그가 상실한 '아버지'와, 거대한 산업사회에 대응하는 논리는 풍자이고, 이 풍자는 '절망으로부터 오고, 절망은 열망으로부터 오고, 열망은 욕망으로부터 오고, 나의 욕망은 생으로부터'(<그들은 결혼한 7년이 되며>)오는 것이다. 이러한 풍자성은 그의 시적 진정성을 밝히는 하나의 의미망이라 할 수 있다. 다음 시를 살펴보자.

⑴ 워어메 요거시 머시다냐/요거시 머시여/응/머냔 마리여/사람미치고 화안장하것네/야/머가 어쩌고 어째냐/옴메 미쳐 불것다 내가 미처부러/아니/그것이 그것이고/그것이 그것이고/뭐/그것이야말로 그것이라니/이런 세상에 호랭이가 그냥/캭/무러갈 불 놈 가트니라고/야/너는 에비 에미도 없냐/넌 새끼도없어/요런 호로자식을/그냥 갓다가/ - <1983년/말뚝이/발설> 부분

⑵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골목 어귀에서 우연히, 똥개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 똥개의 눈이 하두 맑고 슬퍼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그놈을 눈깔이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아 그랬더니 그놈도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를, 눈깔이 뚫어져라 바라본다. 우리나라 봄하늘 같이 보도랍고 묽은, 똥개의 그 천진난만-천진무후한 角膜→水晶體→網膜 속에, 노란 봉투 하나 들고 서있는, LONDON FOG表 ホ``リエステル 100% 바바리 차림의, 나의 全身이, 나의 全貌가, 나의 全生涯가 들어가 있다. - <똥개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 부분 ⑶ 신문이 말하는 視界제로에 대해 치안본부는 절대로 고문한 사실이 없다고 발표했다. 고통의 배기통이 콱 막힌 버스가 급정거했다. 급격한 우회전은 승객의 머리를 좌경화시킨다는 걸 몰라요? 기회에 민감하다는 下馬評을 받고 있는 한 온건론자는 말했다. <중심의 상실>을 쓴 예술사학사자 세들 마이어씨는 나치협력자였다. 4·19 세대, 정부 여당 관념조정부장 金益達씨(44)는 수유리 묘소에 헌화했다. 대리석 속의 상한 이름들. 상채기에서 꽃잎을 밀어내는 진달래. 상흔은 치유를 위해서 있다는 말로 그는 기념사에서 가름했다. 그는, 정치적 위생관념을 강조했고 理性을 강조했다. 비위생적인 것에 대한 대안은 주문제 식단이었다.이성의 기념케이크 속에 방부처리된 이스트. 살아있는 것은 모두 보균자였다. - <꽃말> 부분

풍자(Satire)는 '정치적 현실, 세상 풍조, 인간 생활의 결함?font color=red>ㅎ픗? 불합리, 우열, 허위 등에 가하는 기지와 비판적, 조소적 발언'을 의미한다. 시 ⑴, ⑵, ⑶의 공통점은 언어 유희와 풍자이다. 시 ⑴은 '말뚝이'라는 광대를 화자로 하여 세상을 풍자하고 있다. 시 형식에 있어서도 파격적이고, 어조는 가히 조롱적이다. '1983년'의 세계는 '발설'하기 힘든 '닫힌 사회'이고, 이 닫힌 사회에서 화자는 기지와 비판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당대의 우울한 시선이 날카롭게 풍자되고 있다. 비극적 세계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기인하는 이 풍자 정신은 화자가 세계에 대응하는 우회적인 현실 대응 능력이다.

시 ⑵는 '똥개' 한 마리와 마주친 상황이 시화된 예이다. 억압의 구조에 대응하는 화자의 논리는 치밀하면서도 날카로운 풍자가 도사리고 있다. 이 시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의식은 화자의 '전신'을, '전모'를, '전생애'를 꿰뚫어 보는 또다른 자아의 풍자이다. 이 시를 접하면서 화자가 만나는 세계는 철저한 자기 비하에 놓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똥개'의 눈에 비친 초라한 화자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또다른 자아의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언어 유희를 넘어서는 고도의 풍자적 세계를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고도의 풍자는 시 ⑶에서 더욱 노골화되어 나타난다. 시 ⑶의 화자는 모순된 사회의 우울한 세계를 풍자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시 ⑴의 '말뚝이'와 같은 존재이다. 이 시는 비극적인 경험을 비판적, 풍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는 삐딱한 언어 풍자와,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반어적 풍자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신문에 실린 모든 기사가 허위임을 폭로하면서, 그 생활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을 모두 '보균자'로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짓눌린 나약한 현대인의 비극적 자아상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실의 공간을 넘어서는 자리에 존재하는 이 시인의 풍자적 언어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와 같은 풍자는 그의 시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다음 시들은 현대인의 욕망 결핍과 관련한 성풍속도를 풍자한 예이다.

⑴ 여자를 개같이 엎드려 놓고 성교하고 싶어. 침?을 거야? 추악이 즐겁지? 너를 신고할 테다. 제발 그래 줬으면 고맙겠어. 확인해 주니까. 확인해 주니까 - <이준태(1946년 서울生, 연세대 철학과 졸, 미국 시카고 주립대학 졸)이 근황> 부분

⑵ 그가 그녀의 배위에서, "그년"과 놀아난 "표"를 지우려 하면 할수록, 보성물산주식회사 차장 장만섭씨는 영동의 룸쌀롱 "겨울바다"(제목이 참 고상하지. 시적이야 그지?)의 미스 쵠가 챈가 하는 "그년"을 더욱 더 실감으로 만지고 있는 것이다.……어쩌구 저쩌구 해서 오늘 장만섭씨는 미스 쵠가 챈가 하는 여자를 낮에 만났고, 대낮에 여관으로 갔다. - <徐伐, 셔?, 셔?, 서울, SEOUL> 부분

시 ⑴, ⑵는 현대인의 문란한 성풍속을 풍자하고 있다. 이 두 시는 현대 사회의 샐러리맨 화자를 통하여 성윤리를 우회적으로 보고하고 있다. 화자는 객관적 관찰자로 있으며, 등장 인물의 근황을 보고하는 타자로 존재한다. 여기에서 화자는 '가짜의 표'를 달고 있는 현대인의 파괴된 실존을 풍자하고 있다. 화자는 이른바 형식주의의 '낯선 상징'을 '일상의 상징'으로 풍자하고 있다. 이 시에서 상징은 '보여주기'의 서사적 기법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파괴적 풍자로, 혹은 일상의 파괴화로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시 ⑴, ⑵에서 성모랄은 우리에게 음험한, 혹은 날카로운 역설적 풍자이다. 이 두 시에서 보여준 일상성의 보고는 의식의 단절을 고도의 풍자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인의 성윤리를 여과 없이 서술적 기법으로 풍자하는 기민성을 갖고 있으며, 세계에 대한 역설적 풍자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이 두 시에서 상실과 욕망을 넘어서는 고도의 풍자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시는 이미 이상의 시에서도 그 전례를 밝힌 것과 같이, '색정적 이미지를 통한 낯설게 하기'이다. 또한, 이것은 이상과 마찬가지로, '욕망 결핍'에 따른 모성적 본능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모성적 본능은 대개 여성에 대한 그리움, 성적 유희 본능으로 시화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속된 성적 유희로 나타나기도 하고(<'象徵圖' 찾기>, <'뱀풀'의 詩作 메모> 등), '죽은 시대를 屍姦'하는 '물'의 이미지로 시화되기도 한다(<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1>, <오늘날, 箴言의 바다 위를 나는> 등). 이러한 모성 본능의 성적 유희는 그의 시에 나타나는 풍자성을 이해하는 또다른 측면이다. 그리고 '풍자'는 황지우 시의 현대적 가치를 규정짓는 새로운 의미망이기도 하다.

4

황지우 시의 미덕은 '아버지 상실'과 그 욕망의 시대를 넘어서는 자리에 존재하는 상징적 풍자에 있다. 이는 전통의 현대적 계승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지우 시의 상징과 풍자를 서구적 잣대로 재단하려는 것은, 우리 시의 진정한 가치성을 서구 문예의 추종자로 붙들어매는 역할만을 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황지우 시는 자아의 절망에서 비롯하는 철저한 허무 의식을 극복하려는 상징 미학이며, 이것은 시인의 시대에 대한 절망적 고뇌와, 원형적 '아버지 상실'과 닿아 있는 것이다. 황지우 시는 80년대 우리 시대의 어두운 자아의 우울한 시적 대응이다. '자아'와 '세계'의 대립에서 절망한 화자의 모습은 당대 우리의 절망이기도 하다. 따라서 황지우 시의 상징적 의미를 정확히 밝히는 작업은, 우리 문학의 자생적 성과를 평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황지우 시의 상징과 풍자는 화자의 현실 극복의 방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황지우 시는 우리 문화의 자생적 현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동시에 우리 문학에서 새로운 상징과 풍자의 세계를 열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동안 황지우 시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과대 포장하면서 생긴 반향을 냉철히 반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황지우 시의 잘못된 평가는 기법의 모방만을 일삼는 여러 에피고넨 작가와 시인을 양성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닌지 반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문단에서 시 기법의 모방만을 일삼는 일군의 시인들은 자기의 진정한 상징이 무엇인가를 자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포스트적 증후군의 수많은 아류는 계속적으로 우리 독자를 당혹하게 할 것이다.

/ 거대한 거울 

한점 죄(罪)없는

가을 하늘을 보노라면

거대한 거울,

이다:

이번 생의 온갖 비밀을 빼돌려

내가 귀순(歸順)하고 싶은 나라:

그렇지만 그 나라는

모든 것을 되돌릴 뿐

아무도 받아주지는 않는다

대낮에 별자리가 돌고 있는

현기증나는 거울

/ 거룩한 식사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나, 이번 生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中古品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괘종시계가 오후 2시를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 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괘종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 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膜(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 밸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도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괘종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 평의 삶: 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 "그래, 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 게 눈 속의 연꽃 

1

처음 본 모르는 풀꽃이여, 이름을 받고 싶겠구나

내 마음 어디에 자리하고 싶은가

이름 부르며 마음과 교미하는 기간,

나는 또 하품을 한다

모르는 풀꽃이여, 내 마음은 너무 빨리

식은 돌이 된다, 그대 이름에 내가 걸려 자빠지고

흔들리는 풀꽃은 냉동된 돌 속에서도 흔들린다

나는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짐승이다

흔들리는 풀꽃이여, 유명해졌구나

그대가 사람을 만났구나

돌 속에 추억에 의해 부는 바람,

흔들리는 풀꽃이 마음을 흔든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

불을 기억하고 있는 까마득한 석기 시대,

돌을 깨뜨려 불을 꺼내듯

내 마음 깨뜨려 이름을 빼내가라

2

게 눈속에 연꽃은 없었다

보광(普光)의 거품인 양

눈꼽낀 눈으로

게가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피워올렸다

눈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연꽃을

게는,그러나,볼 수 있었다

3

투구를 쓴 게가

바다로 가네

포크레인 같은 발로

걸어온 뻘밭

들고 나고 들고 나고

죽고 낳고 죽고 낳고

바다 한 가운데에는

바다가 없네

사다리는 타는 게,

게좌(座)에 앉네

/ 길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

朝鮮八道,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내항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 나무는 단단하다 

사시사철 나무는 물질이다

나무는 단단하고 무표정하다

거무튀튀한 껍질은 무언가 맘에 안 든다는

무언가 거부하고 있는 듯한 기분 나쁜 표정이다

인상 팍 쓰고, 나무는 사시사철……, 화해가 필요하다

나무는 억세고, 거칠다

기쁜 나쁘다 나무는, 원색적이다

나무는 굶주려 있다

부르터지도록 나무는 공기, 먼지, 소음, 냄새,

흙을 빨아먹는다

타는 갈망이 나무를 푸르게, 푸르게 한다

푸르른 나무는 나무의 색(色)이다

잠시, 나무는 정신(精神)이 든다

/ 내 마음의 개마고원 

수많은 '너'안에서 나는 '나'를 증언하게 된다.

너를 찾아서 영동 유흥가를 지나갔었다.

신흥 시가지 좋은 집들 사이 사이에,

아, 나는 황토에 뿌리박은 옥수수나무 몇 그루를 본다.

어디로 갔느냐, 너, 원주민이여?

거기 사람 있으면 소리지르고 나오시오.

대답 없고

옥수수나무만이 털을 꺼내놓고 모음(毛淫)을 한다.

가을, 내 마음의 개마고원이 청회색(靑灰色)의 개마고원으로 옮겨간다.

살아 있으세요. 없어서 그리운 당신.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 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너무 오랜 기다림 

아직도 저쪽에서는 연락이 없다

내 삶에 이미 와 있었어야 할 어떤 기별

밥상에 앉아 팍팍한 밥알을 씹고 있는 동안에도

내 눈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간

현대중공업 노동자 아래의 구직난을,

그러나 개가 기다리고 있는 기별은 그런 것은 아니다,

고 속으로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보고 있다

저쪽은 나를 원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어쩌다가 삶에 저쪽이 있게 되었는지

수술대에 누워 그이를 보내놓고

그녀가 유리문으로 돌아서서 소리나지 않게

흔들리고 있었을 때도

바로 내 발등 앞에까지 저쪽이 와 있었다

저쪽, 저어쪽이

/ 늙어가는 아내에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농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의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은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봄바다 

봄바다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란 꽃잎들이

가득 흘러간다

노랑나비가 그 이상한 꽃에 홀려

一生으로 못 갈 바다를 따라간다

앞뒤 안 보고

더듬이로만

노란 그 목표물에 밀착해서

멋 모르고 가다 보니

발 댈 곳 없는 물 위였다

不歸不歸

끝 간 데 없는 심연을

건너 간다

이 작은 나래로

한 바다를 건너 갈 수 있을까

봄바다에 이름 없는 수천의 노랑

나비들이 가득 떠 있다

섬으로 가기 위해

노란 꽃과

노랑나비의

人海戰術

목에 유채꽃 花還을 두른 섬이

綠色 바다에서 올라온다

/ 붉은 우체통 

버즘나무 아래

붉은 우체통이

멍하니, 입벌리고 서 있다

소식이 오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思想이 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여, 비록 그대가

폐인이 될지라도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고 쓴 편지 한 통 없지만,

병원으로 가기 위해

길가에서 안개꽃 한 묶음을 사는데

두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뱃가죽에 타이어 조각을 대고

이쪽으로 기어서 온다

/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창(槍) 꽂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希望)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自請(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들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공중 가득 흰 꽃팝 튀겨놓은 날

잠시 세상 그만두고

그 아래로 휴가갈 일이다

눈감으면

꽃잎 대신

잉잉대는 벌들이 달린,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소리-나무 한그루

이 지상에 유감없이 출현한다

눈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받으며 지나갈 때

팝콘 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장사 가는 벚꽃길 어쩌다 한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 여기서 쬐금만 더 머물다 가자

/ 재앙스런 사랑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生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體溫(체온)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 12월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家産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生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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