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 마네킹 / 강서연
란제리도 망사스타킹도 액세서리도
색 바랜 바바리코트도 한데 뒤엉켜있던 가판대
가을 정기세일을 마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마네킹들이 서 있다
가로등 불빛이 훤하게 조명을 비추는 쇼윈도
은행나무의 옹이가 생식기처럼 열려 있다
저 깊은 생산의 늪에 슬그머니 발을 넣어보는 저녁
어둠이 황급히 제 몸을 재단해 커튼을 친다
첫눈이 내린다
칼바람을 따라가며 천을 박는 발자국들
재봉틀 소리에 맞춰 나무의 몸속에서도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길도 불빛도 사람들도
왕십리 돼지껍데기집 화덕 위에 불판으로 모여든다
올해의 유행은 몸에 딱 달라붙는 레깅스 패션
마지막 단추까지 꼼꼼하게 채운 새들은 어디까지 갔을까
오래 서 있어서 아픈 플라타너스 무릎에
가만히 손을 얹는 홑겹의 흰 눈발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인데, 신기하지
낯선 골목에 당신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니
네게선 물이 자란다, 언제 내게서 그런 표정을 거둘거니
누군가가 대신 읽어준 편지는 예언서에 가까웠지
막다른 골목길에서 나의 감정을 선언하니
벽이 조금씩 자라나고, 그 때에
당신은 살아있구나, 눈치 챘지
문장의 바깥에 서서
당신은 긴 시간동안 사람이었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언젠가 손을 맞잡았던 적이 있지, 짧게
우리라고 불릴 시간은 딱 그만큼이어서
나에겐 기도가 세수야
당신을 미워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오래 마주보고 있기엔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
표정은 쉽게 미끄러지고
벽을 등지고 걸으면 내 등이 보이는 오늘
누구랄 것 없이 녹아 흘러내리지만
언제나 당신은 젖지 않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기일 축하해,
입술을 달싹일 때 해안선이 느리게 펼쳐진다 거기 혀가 있다 행려병자의 시체 같은
풀잎처럼 흔들리는 그림자달은 빙산이 되어 은빛을 풀어헤친다 물빛을 깨고 비치나무 냄새 번져오는
젖을 희끗희끗 빤다 안개, 서늘한 빗방울, 물방울 띄워올린다 뿌리가 부풀어오른다 물거품처럼
*
웅웅거리고 부서지고 내장처럼 고요 쏟아져 내리고 내려야 할 역을 잃고 흘러가는 페름 행 전신주 흰 눈송이들 백야의 건반을 치는 사내 ―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 길고 가는 손가락 갈라지고 떠도는 핏방울 소용돌이 변두리로 나를 싣고 창 밖 쁘이찌 야흐 행 마주보며 또 길게 늘어나고 민무늬 토기처럼 얼굴 금이 가고 스쳐가는 가가문비나무 그늘 나뭇가지 그림자 일렁이는 시간 산란하는 밤의 시작을 경계를 지나 나는 또 바라보고 있고
마젤란 펭귄들 발자국 소리 울음 아 미역줄기처럼 늘어지고
*
움푹 파인 자국발자국들 혀 뿌리가 길게 늘어져 꿈틀거린다 하얀 모래밭 그리고 하얀 추위, 그리고 하얀 포말
기억과 마디가 끊긴 생선뼈와 조개 무덤 사이를 가마우지들 종종 걸어나오고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 우수아이아, 숲길, 뒤틀린 비치나무 뿌리, 물거품이 사그라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