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갑시다 / 허수경

이온디
2007년 08월 19일
그대가 나의 오라비일 때, 혹은 그대가 나의 누이일 때
그때 우리 함께 닭다리가 든 도시락을 들고 소풍을 갑시다,
아직 우리는 소풍을 가는 나날을 이 지상에서 가질 수 있어요,
우리는 그 권리가 있어요.

소풍을 가는 날,
가만히 옷장을 보면 아직 개키지 않은 옷들이 들어 있어도 그냥 둡시다.

갈잎 듣는 그 천변에서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므로, 돌아올 것이므로,
그날  그 소풍에 가지고 갈 닭다리를 잘 싸고 포도주 두어 병도 준비하고,
그대가  내 오라비로만 이 지상에서
그대가 나의 누이로만 이 지상에서 살아갈 것을 서약은 할 수 없을지라도
오래 뒤에 내가 그대를 발굴할 때,
그대의 뼈들이  있을 자리에 다 붙어 있었으면 합니다.

그 이름 없는 집단무덤에서 우리는 얼마나 머리 없는 뼈들을 보았던가요
울지 맙시다,
작은 소녀가 웅크린 그 부엌 안에 작은 불을 켜며 라디오를 켜며
서약한 많은 나날들이 연빛 웃음처럼,
소녀 또한 연등빛 웃음처럼
저 폭약 많은 오후에 사라져갈지라도

우리들이 먹은 닭다리가 저 천변에 햇빛에서 아득해질지라도
오 오 소풍을 갑시다,
울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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